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주노동자 등골 빼먹는 사업주…사업장 변경해 줄 테니 “돈 내라”
1. 개요
고용허가제(E-9)로 일하는 이주노동자가 일터를 옮기거나 그만두려 할 때 사업주가 계약 해지에 동의해 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을 요구한 일들이 있었다. 2024년 전남 고흥 사례 이후 광주·나주·여수·목포를 거쳐 2026년에는 경남 밀양까지, 요구 금액도 150만 원에서 최대 700만 원까지 커지며 잇따라 드러났다.
이주노동계는 이를 "사실상 인신매매" 라고 부른다. 고용허가제에서 E-9 노동자는 사업주의 동의 없이는 사업장을 옮기기 어렵고, 동의 없이 나가면 체류 자격이 흔들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돈을 요구받아도 거절하기 어렵고, 그 약점을 일부 사업주가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노동부는 금품 요구를 직접 막거나 돈을 돌려받게 할 권한이 없다고 밝혀, 제도의 빈틈이 문제로 떠올랐다.
2. 왜 돈을 내고 나가야 하나
고용허가제는 국내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게 한 제도다. E-9 노동자는 원칙적으로 사업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없고, 사업주가 근로계약 해지에 동의하거나 계약 기간이 끝나는 등 법에서 정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임금 체불이나 폭행처럼 고시에서 정한 "노동자 책임이 아닌 사유" 를 노동청에서 인정받으면 사업주 동의 없이도 옮길 수 있지만, 이를 인정받지 못하면 사실상 사업주의 동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업장을 옮긴 뒤에도 법정 구직기간 3개월 안에 새 일터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이 더해진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을 넘겨 미등록 체류나 강제 출국 위기에 놓인 사례는 2021~2025년 1만 1천여 건으로, 2025년에는 3,708건까지 늘었다. 사업주가 노동자를 "이탈" 로 신고하면 체류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도 크다. 이로 볼 때 사업주의 금품 요구는 노동자가 쉽게 거절할 수 없는 구조 위에서 이뤄진다.
3. 잇따른 사례
3.1. 고흥과 광주·나주
2024년 10월 전남 고흥에서 사업장 변경 대가로 300만 원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2025년 6월에는 광주 평동공단과 나주의 한 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사업장 변경 대가로 각각 100만~200만 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지 못했고, 노동부 조사가 시작된 뒤에야 돈을 돌려받았다. 지원 단체는 같은 해 11월 광주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를 알리고 전수조사를 요구했다.
3.2. 여수 — 1인당 500만 원
2026년 9월에는 여수의 한 어업 사업장 사례가 알려졌다. 지원 단체에 따르면 사업주는 아파서 하루만 쉬게 해 달라는 노동자를 이탈 신고하고, 노동자들이 일을 나간 사이 다시 이탈 신고를 하는 등 압박하다가 숙소의 가스·전기·수도를 끊고 "나가라" 고 했다. 노동자들은 밖에서 노숙했고, 사업장 변경을 요구하자 사업주는 1인당 500만 원씩 모두 2,500만 원을 요구했다가 "250만 원까지 낮춰 주겠다" 고도 했다. 노동부 여수지청은 반복된 허위 이탈 신고를 계약 해지 사유로 인정해 근로계약을 직권으로 해지했다.
3.3. 목포 — 1인당 700만 원
같은 시기 목포에서는 베트남 출신 노동자 2명의 사례가 드러났다. 2026년 8월 외국인등록증 발급 기한이 다가오자 이들은 하루만 조업을 미뤄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나가라" 는 통보와 숙소의 전기·가스 차단이었다. 노동자들이 근로계약 해지를 요구하자 사업주는 사업장 변경 조건으로 1인당 700만 원을 요구했고, 줄여 달라는 호소에 "600만 원 이하는 안 된다" 고 했다고 한다. 전남광주 43개 시민사회·노동·인권단체는 10월 1일 노동부 목포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자들이 8월 24일 진정을 냈는데도 지청이 응답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3.4. 밀양 — "150만 원 주러 갑니다"
2026년 10월 7일 매일노동뉴스는 경남 밀양 사례를 단독 보도했다. 네팔 출신 노동자 A씨는 8월 중순 일방적인 휴일 변경 등 강제 근무를 버티다 못해 그만두려 하자 사업주로부터 "나가려면 150만 원을 마련해 오라" 는 말을 들었다. 회사 기숙사에서 5만 원권과 1만 원권을 세며 "내일 저는 사장님한테 150만 원 주러 갑니다" 라고 말하는 영상이 공개됐고, 그는 다음 날 돈을 주고 일터를 나왔다. 이렇게 돈을 내고 나간 사람이 1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남광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지적을 뒷받침한다. 전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은 올해만 전북 군산, 충남 보령·서산, 경기, 강원 등지에서도 비슷한 상담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4. 노동부의 대응
노동부는 금품 요구 사건이 드러날 때마다 현장 조사를 거쳐 사업장 변경 승인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여수 건에서는 사업장 변경을 승인했고, 목포 700만 원 건은 사업주를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금품 요구 자체는 사업장 변경 사유로 명시돼 있지 않아, 노동부가 직권으로 변경을 승인하려면 다른 사유가 함께 인정돼야 한다. 노동부 관계자는 고시에 금품 요구를 넣는 것은 "아직 고려하고 있지 않다" 고 밝혔다.
이미 건넨 돈을 돌려받게 할 권한도 없다. 노동부 관계자는 "돌려주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강제할 수 있는 법 규정이 없어 시정지시할 수 없다" 고 말했다. 결국 돈을 돌려받으려면 노동자가 직접 소송을 내야 하는데, 신분상 불이익과 비용을 걱정하는 이주노동자에게는 문턱이 높다. 노동부는 최근 사업주들에게 금품 요구가 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안내문을 보냈다.
5. 진위 논란
사례 가운데 일부는 노동부 조사로 확인됐고(여수 계약 직권 해지, 광주·나주 반환), 목포·밀양 건은 조사 중이다. 남는 쟁점은 이것이 일부 사업주의 일탈인가, 아니면 고용허가제 구조가 만든 보편적인 문제인가이다.
5.1. 구조의 문제라는 시각
지원 단체들은 이것이 개별 사업장의 일탈이 아니라 "일반화된 상황" 이라고 주장한다. 사례는 2024년부터 해마다 지역을 넓혀 가며 이어졌고, 요구 금액은 150만 원에서 700만 원까지 계속 올랐다. 노동자가 사업주 동의 없이 나가기 어렵고, 나가더라도 3개월 안에 재취업하지 못하면 체류가 위태로운 제도에서, 사업주에게 "동의" 는 곧 돈이 될 수 있다. 노동부조차 금품 요구를 막거나 돈을 돌려받게 할 수단이 없다고 인정한 상황에서, 과연 이것을 몇몇 악덕 사업주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 이주노조 측은 사업주 동의 없이도 사업장을 옮길 수 있게 하면 사업주가 돈을 요구하기보다 노동 환경을 개선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5.2. 일부의 일탈이라는 시각
반면 지금까지 드러난 사례는 수십 명 규모이고, E-9 노동자는 34만 명에 이른다. 전국 단위의 공식 실태조사가 없어 얼마나 퍼져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사례 대부분은 노동자 측 진정과 지원 단체의 주장으로 알려졌을 뿐 사업주 측 해명은 보도되지 않았다. 또 여수 건처럼 노동부가 허위 이탈 신고를 근거로 계약을 직권 해지하는 등 기존 제도 안에서 구제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고용허가제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하기보다, 확인된 사업주를 엄정히 처벌하고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먼저라는 시각도 성립한다. 다만 계약 해지 대가의 금품 요구가 공갈이나 사업장 변경 방해로 처벌될 소지가 있다는 해석에도, 실제 처벌 사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6. 여담
- 고용허가제 사업장 수는 2025년 4분기 5만 8,142곳으로 3년 전보다 19.8% 늘었지만, 같은 기간 E-9 체류 노동자는 34만 4,403명으로 28.3% 늘어 사업장보다 노동자가 더 빨리 늘었다. 사업장을 옮기는 데 걸리는 평균 기간도 2021년 25.7일에서 2025년 39.3일로 길어졌다.
- 2023년 정부가 신설한 "권역별 이동 제한" 이 재취업할 수 있는 지역을 좁혀 구직 기간을 늘렸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