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서울대 박사가 일가족 데리고 월북한 사건
1. 개요
1985년 독일에서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간 오길남 박사가 이듬해 홀로 탈출한 뒤, 북에 남은 아내 신숙자와 두 딸 오혜원·오규원이 요덕수용소 특별통제구역으로 끌려가 수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일이 있었다. 신숙자가 경남 통영 출신으로, '통영의 딸' 사건으로도 불린다.
가족의 생사와 처지는 지금까지 직접 확인된 적이 없다. 북한은 2012년 유엔을 통해 신숙자가 간염으로 사망했고 두 딸은 아버지를 만나길 거부한다고 답했다. 오길남 박사와 대북인권단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 모녀의 소식은 탈북민의 증언과 간접 정황, 북한의 공식 답변이 엇갈린 채 남아 있다.
2. 입북까지의 경위
오길남은 1942년생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0년 독일로 유학을 갔고 1985년 브레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숙자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1976년 유학 중이던 오길남을 만나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고 한다. 서울신문이 전한 강연회 증언과 뉴스엔의 방송 보도를 종합하면, 신숙자가 간염이 악화된 데다 교통사고까지 당해 휴직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다.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오길남은 이미 40대 초반이어서 교수 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북한 공작원이었다. 공작원은 오길남에게 북한에 와서 일하면 아내를 평양 최고 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서울신문 보도에는 "오 박사에게는 교수직을, 아내에게는 치료를 보장한다"는 제안으로 요약돼 있다. 방송에 따르면 신숙자는 처음에 "당신 혼자 가고 정 괜찮다 싶으면 나중에 우리를 데려가라"며 반대했다. 오길남이 고집을 꺾지 않자 그녀는 이 선택이 큰 불행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하고서야 동행했다고 한다. 오길남은 이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그때는 무슨 환상에 사로잡혔던 건지 나 자신에 속았다"고 회상했다.
3. 북한에서의 생활과 오길남의 탈출
기대와 달리 북한에서의 삶은 약속과 거리가 멀었다. 오길남 일가는 1985년 12월 입북한 직후 초대소에서 3개월간 사상 교육을 받았고, 이후 평양 시내 아파트에 배정됐지만 전력난에 시달렸다. 약속했던 교수직은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오길남은 칠보산 연락소의 대남방송 '구국의 소리' 요원으로 동원됐고, 연합뉴스는 그가 공작원 훈련소에 배치돼 대남 흑색선전 등에 쓰였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오길남은 "북행을 결정한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짓이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탈출의 계기는 북한이 내린 새 임무였다. 서독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두 명을 덴마크로 유인해 오라는 지령이었다. 오길남이 이를 아내에게 털어놓자, 신숙자는 혼자 나가서 어떻게든 가족을 꺼내 달라며 탈출을 권했다고 한다. 그는 코펜하겐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박사학위증 사본과 도움을 청하는 쪽지를 공항 직원에게 몰래 건네 입북 1년 만에 빠져나왔다. 더쿠 게시물에 실린 정리표에는 이 시점이 1986년 11월 13일로 적혀 있다.
그러나 탈출이 곧 가족과의 재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길남은 북한 활동을 비밀로 하고 한국에 가지만 않으면 북한이 가족을 풀어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뉴스엔은 이를 착각이었다고 전했다. 북한은 오길남이 5년간 사과문과 탄원서를 보내자 1987년과 1988년에 '돌아오라'는 내용의 부인 편지를 전달했다. 1991년에는 수척해진 아내와 딸들의 사진, 그리고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보냈다. 서울신문 보도에는 북한이 가족을 인질로 삼아 재입북을 강요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다. 오길남은 결국 1992년 한국에 입국했다.
4. 요덕수용소 수용 사실의 공개
이 사연이 널리 알려진 것은 2011년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용자 구명운동을 하던 단체가 그해 통영에서 연 전시회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가 계기였다. 같은 해 7월 26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북한 인권 바로알기 강연회'에서는 탈북자 강철환·안혁이 신숙자(당시 69세)와 두 딸이 요덕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고 증언했다. 1991년 사진의 배경이 요덕수용소였다는 사실도 이후 드러났다고 뉴스엔은 전했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송에서 실제 요덕수용소 생활 경험이 있는 탈북민들은 세 모녀가 '남조선댁', '독일댁'으로 불렸고 대인기피증이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집에 북데기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자결하려던 것을 누군가 발견해 겨우 살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다만 이는 방송이 전한 증언이어서 다른 경로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5. 북한의 공식 답변과 오길남의 반발
이후 전국적인 관심 속에 국내외에서 송환 운동이 벌어졌고, 2012년 북한이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2012년 5월 8일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ICNK)와 오길남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엔 임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의 요청으로 북한 당국이 4월 27일 보내온 답변이 이 자리에서 공개됐고, 리장곤 차석공사 명의로 된 답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신숙자는 1980년대부터 앓아 온 간염으로 사망했다.
- 오길남이 가족을 버리고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두 딸(당시 혜원 36세, 규원 34세)은 그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으며 접촉을 강하게 거부한다.
- 이 건은 임의적 구금과 아무 관련이 없다.
오길남은 "근거 없는 주장을 담은 북한 당국의 공식문건을 사실로 수용할 수 없다"며 "제 아내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ICNK는 사망 시기와 장소, 사망증명서, 유해 송환을 요구하고, 두 딸이 구금되지 않았으며 아버지를 만나길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객관적으로 증명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연합뉴스는 이 답변을 '신숙자는 요덕 수용소에서 간 질환으로 사망했고 두 딸은 살아 있으나 아버지를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취지로 정리했다. 노컷뉴스가 옮긴 답변문에는 장소가 적혀 있지 않아 매체마다 서술이 다르다. 이후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6. 이후 전해진 소식
2016년 11월 오길남은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로 임진각을 찾아 북의 두 딸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는 "큰딸의 나이가 벌써 마흔인데" 인도적 차원에서 죽기 전에 딸들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최성용 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은 두 딸이 수용소에서 나와 평양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고 전했다. 어머니가 숨진 뒤 오길남에게 편지를 전하려다 북한 당국에 발각됐다는 소식도 들었다고 했다.
2023년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594회에서는 최성용 대표가 수소문한 결과를 전했다. 신숙자는 간경화로 사망했고, 두 딸은 북한 정부가 평생 감시할 수 있도록 내부 관계자와 강제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다. 방송에 따르면 오길남은 요양병원에 머물며 딸들이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러 베를린에 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더쿠 게시물에 실린 정리표에는 신숙자가 2008년 무렵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표기가 있다. 사망이 '확인'된 시점은 2012년 5월 8일로 정리돼 있다.
7. 진위 논란
핵심 쟁점은 신숙자 모녀가 북한 당국에 의해 요덕수용소 등에 구금된 채 살아왔느냐, 아니면 북한의 주장대로 구금과 무관하게 모친은 병사하고 딸들은 스스로 아버지를 거부했느냐다. 신숙자의 사망 시기와 장소, 두 딸의 현재 상태는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7.1. 구금·수용이라는 쪽
이쪽이 가장 먼저 드는 근거는 1991년에 북한이 직접 보낸 사진과 테이프다. 사진 속 배경이 정치범수용소인 요덕수용소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는데, 구금과 무관한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사진을 찍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요덕수용소에서 생활했던 탈북민들과 강철환·안혁 등이 세 모녀가 요덕수용소에 있었다고 증언한 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북한의 대응 방식도 의심을 키운다. 북한은 1987~88년 부인의 이름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가족이 북한 안에 인질처럼 잡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정황이라는 것이다. 정말 임의구금이 아니라면 사망 시기와 장소, 사망증명서, 유해를 내놓지 못할 까닭이 없다. ICNK가 이를 공개 요구했지만 이후 별다른 진척은 없었고, 최성용 이사장은 우리 측이 납북 피해자 가족 명단까지 갖고 있는데도 북한이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말했다. 딸들이 "아버지를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답변 역시 감시 아래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한편 평양 결혼설이나 강제 결혼 추정은 오히려 사실상 감시 체제에 놓여 있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7.2. 구금이 아니라는 쪽, 그리고 확인 불가라는 쪽
북한은 신숙자가 1980년대부터 앓던 간염으로 사망했고, 두 딸은 자기 의사로 오길남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며 구금을 공식 부인했다. 이 답변은 유엔 실무그룹의 요청에 따라 보내온 공식 답변이다. 오길남이 가족을 북에 두고 홀로 탈출한 것은 사실로 전해지며, 탈북 외교관 고영환조차 처음 1, 2년은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털어놓을 만큼 이 점이 비난받을 소지가 있는 대목이다.
전해진 내용 자체가 엇갈린다는 점도 신중론의 근거다. 연합뉴스는 오길남이 탈출한 뒤 독일에서 가족과 생활했고, 가족은 그 뒤에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서술했다. 다른 보도는 아내와 딸들이 입북 이후 줄곧 북한에 남았다고 전해 서로 맞지 않는다. 신숙자의 사망도 2008년경이라는 표기와 2012년 확인이라는 서술이 공존하고, 병명은 간염, 간경변, 간경화, 간 질환으로 갈린다. 오길남이 윤이상의 월북 권유와 협박을 진술했을 때 유족과 진실 공방이 벌어진 사례도 있다. 결국 '특별통제구역'이라는 표현 자체는 더쿠 게시물에만 나오며, 구체적인 수용 시설과 구역, 시기는 확인된 바 없다.
양쪽 모두 직접 확인된 증거를 내놓지 못한 상태여서, 신숙자의 사망 여부와 두 딸의 처지에 대한 결론은 열려 있다.
8. 여담
- 신숙자는 통영여중 9회 졸업생으로, 경남 통영 출신이다.
- 뉴스엔은 평양 아파트 생활을 두고 "1930년대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고 서술했고, 더쿠 게시물에 실린 방송 캡처 자막에는 "한 발짝도 1930년대를 못 벗어났구나"라는 문구가 나온다.
- 고영환은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오길남과 10년간 함께 일했는데, 술자리에서 오길남이 "애들 얼굴만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며 펑펑 울던 일을 계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방송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