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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침입한 신라 해적 '신라구'(新羅寇)
1. 개요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 신라 해안을 근거지로 삼은 신라인 해적 집단이 쓰시마와 규슈 일대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일본 측 사서에는 '신라의 입구(新羅の入寇)' 또는 '한구(韓寇)'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해적 활동은 일본 측 피해가 누적되면서 일본 조정이 신라인의 입국과 귀화를 제한하는 조치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다만 신라구에 관한 기록은 한국 측 사료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일본 측 사서에 집중되어 있어, 실제 규모와 배후를 둘러싸고는 여러 해석이 공존한다.
2. 신라구가 등장한 배경
통일신라 말기에는 골품제의 폐단이 심해지면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졌고, 각지에서 산적과 도적, 수적 등이 창궐했다. 이 가운데 구 백제 지역 출신 유민들이 해적질에 뛰어들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들이 신라 백성을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장보고가 완도 일대에 청해진을 세우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한반도 내에서는 해적 활동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러자 해적들은 장보고의 관할 밖이면서 털기 좋은 지역을 찾았고, 그 대상이 된 곳이 일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일본은 헤이안 시대 중기로 율령제가 약화되어 중앙 정부의 통제가 느슨했고, 서부 지역의 방비가 허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일본 연안의 피해
811년 12월에 신라인 약 110명이 다섯 척의 배로 오지카시마(小近島)에 침공해 약 9명을 죽이고 100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일본 측 사서인 『일본후기』에 남아 있다. 같은 달 신라선 20여 척이 규슈 사츠우라 해안에 상륙했다는 기록도 함께 전한다. 813년 3월에도 신라인 110명이 다섯 척을 타고 히젠노쿠니의 오지카시마에 상륙해 주민들과 싸웠다고 『일본기략』은 기록한다.
820년 2월에는 도토우미·스루가 두 나라로 옮겨졌던 신라인 700명이 반란을 일으켜 주민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태웠다고 한다. 두 나라가 병사를 동원했으나 제압하지 못했고, 일곱 개 나라에서 병력을 모아 토벌한 끝에 전원이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신라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고 한다.
869년 5월에는 신라 해적이 두 척의 배를 타고 하카타 항구에 와서 연공으로 바쳐지던 비단 등을 약탈해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조정은 신라 해적이 정세의 틈을 노려 침략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신라구를 가리키는 '신라구도(新羅寇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한다.
893년에는 신라 해적이 히젠 지방에 쳐들어와 민가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고, 이듬해인 894년 9월에는 『부상략기』에 신라 도적 무리의 배 45척이 쓰시마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같은 기록에 따르면 사로잡힌 해적 현춘은 신라의 기근과 왕성의 재정 궁핍을 언급하며, 근거지에 배 100척과 병력 2,500명이 있다고 진술했다는 주장이 있다.
4. 신라인 입국 금지와 귀화 금지 조치
이러한 습격이 반복되자 일본 조정이 신라인의 입국과 귀화를 제한하는 법안을 마련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미 귀화한 신라인들을 동쪽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신라 도래인 출신 가문들이 혼슈 동부 지역에 많이 분포하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일본 사회가 이 시기를 거치며 대외 교류가 위축되었고 국풍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는 신라구 한 세력만의 영향이 아니라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로 해석된다.
5. 진위 논란
핵심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라구가 신라 정부와 무관한 순수한 해적이었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이 일본 측 기록에 과장되거나 편향된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5.1. 순수 해적 집단이었다는 쪽
일본 사서가 신라구의 습격을 비교적 구체적인 날짜와 규모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이쪽 주장의 근거다. 『일본후기』, 『일본기략』, 『일본삼대실록』, 『부상략기』 등 여러 사서에 같은 흐름의 사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장군·부장군 같은 계급이 등장하는 점, 100척 규모의 선단이 언급되는 점은 단순한 민간 해적을 넘어서는 조직력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5.2. 신라 정부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쪽
반대편은 신라구가 신라 해안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 그리고 포로 진술에 신라 국왕이 지원한 병력이 섞여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 차원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이 진술의 신빙성 역시 기록의 성격상 확인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함께 나온다. 한국 측 사료에 해적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해석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신라 측 기록이 없다는 것이 신라구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 신라 측이 이를 공식적으로 남기지 않았거나 기록이 전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여담
- 신라구라는 표현 자체는 왜구(倭寇)의 명명 방식을 따른 것으로, 일본 측 사서에 그대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현대 연구자와 언론이 정리하며 쓰기 시작한 용어라는 지적도 있다.
- 신라구 이야기가 한국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는 2008년 KBS1 『역사추적』에서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가 방영되면서였다.